[매일노동뉴스 8.30] 근로자는 근로계약서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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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는 근로계약서로부터 시작한다
박정윤 변호사(법무법인 마중)
▲ 박정윤 변호사(법무법인 마중)위수탁계약서는 마법의 계약서이다. 이 계약서 한 장이면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는 무서운(?) 근로기준법을 피할 수 있다. 근로계약서를 위수탁계약으로 바꾸면 언제든지 근로자를 자유롭게 해고하고 임금을 주지 않아도 단순한 민사채무로 바뀌어 형사처벌에서 면제되는 마법을 부린다.
“자, 계약서에서 근로자로 보일 만한 문구는 다 삭제하세요. 무조건 위임과 수임으로 이뤄진 회사와 프리랜서 관계, 즉 ‘위수탁’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필자가 과거 기업 법무를 하던 회사에서 초짜 변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상사의 자문 지도가 생각난다. 기업측이 프리랜서와 체결한 계약서를 보내오며 ‘근로자’라는 점을 부인하도록 검토해 달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근로자’라는 단어는 물론이고 아주 꼼꼼히 계약서 내용을 발라내며 혹여라도 근로자로 보일 문구들을 찾아서 대등한 위임관계로 바꿔 나갔다. 여러 차례 수정 지시를 거쳐 탄생한 계약서에 기업은 만족해했다.
“사측 변호사는 방망이 깎는 노인과 같이 계약서를 수정하고, 노측 변호사는 중고품 사는 마음으로 계약서의 흠을 찾아낸다.”
근로자를 대변하는 로펌에 입사한 뒤로 내 업무는 180도 바뀌었다. “계약서의 형식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 계약서의 제목은 ‘위탁계약서’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사용자-근로자 관계입니다.” 노측 변호사로서 주장한다.
맞다. 우리 법원은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그 실질에 있어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 다만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사회보장제도에 관해 근로자로 인정받는지 등의 사정은 사용자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성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대법원 2006. 12. 7. 선고 2004다29736 판결 참조)
부당한 갑질 위수탁 계약서가 나중에는 근로자라는 소중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제 나는 사업주가 프리랜서 증거라고 당당하게 제출한 허술한 계약서에서 의뢰인이 근로자로 보일 만한 문구와 내용을 뽑아낸다.
“갑(사업주)는 을(근로자)의 ** 위반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을은 ## 의무를 부담한다.”
처음 계약 체결 당시에는 사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부당한 갑질 조항이지만 다시 보면 회사가 우월한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근로 내용을 정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는 대등한 관계라고 착각하게 하는 부드러운 계약서들이 더 무섭다.
이런 계약서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간혹 계약서조차 없이 열심히 일하다 퇴사 후 미지급 임금과 퇴직금을 청구하고 싶다는 의뢰인을 만난다. 근로자라고 주장할 계약서조차 없는 경우 ‘동업자냐, 아니냐’라는 관문부터 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더 어려운 일이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근로계약서가 있는지부터 묻는다. 없다고 하면 감독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 사건 쉽지 않다”라고 표정부터 드러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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