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80대 경비노동자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일하다 쫓겨났다. 근로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았던 사용자가 믿은 건 ‘가짜 사장’이었다. 관리소장에게 사업자등록을 하게 하고 그를 통해 월급을 지급하게 했다. 관리소장 역시 홍씨와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비노동자는 ‘진짜 사장’을 상대로 미지급된 임금 2천여만원을 달라며 소송에 나섰다. 취약노동자의 호소에 법원의 응답은 단 한 줄이었다. ‘증거 부족’. 경비노동자는 법원에서도 최저임금도 받지 못 한 이유를 들을 수 없었다.

‘사업자등록’으로 가짜사장 만들기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3단독(김현순 부장판사)은 경비노동자 홍아무개(84)씨가 A프라자 입주자대표회의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에서 최근 홍씨측 청구를 기각했다.

홍씨는 서울 동작구의 한 주상복합건물에서 2020년 1월부터 2022년 6월까지 경비원으로 일했다. 주로 주차관리업무를 했다. 근무장소는 지하주차장 내리막 경사로에 있는 미니 컨테이너형 가건물. 몸도 제대로 누이기 어려운 1평 남짓 공간에서 그는 24시간 맞교대제로 격일 근무를 했다.

주말 없이 힘들게 일해서 받은 월급은 고작 120만원. 최저임금 인상폭에 따라 적게는 66만원, 많게는 78만원까지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액수다. 그는 근로계약서조차 받지 못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가짜 사장’을 만들어 고용책임을 회피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관리소장에게 사업자등록을 하게 한 뒤 관리소장 명의로 홍씨에게 월급을 지급했다. 사업자등록은 허울뿐이었다. 사업자명은 관리소장 이름이었으며, 어떠한 인적·물적 자본도 갖추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입주자대표회의측은 관리소장에게 건물관리 용역업무를 도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둘 사이 체결된 용역계약서는 없었다. 관리소장은 관리비 지출금액의 세부항목까지 입주자대표회의 대표의 사전 승인을 받았다. 입주자대표회의 대표는 이를 승인한 뒤에야 관리소장에게 관리비를 입금하는 방식으로 지출을 처리했다.

홍씨측을 대리한 이성영 변호사(심산법률사무소)는 “만약 도급이라면 수급인이 도급인과 건물관리용역비 총액 계약을 하고 도급인에게 항목별 집행내역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 자신의 권한과 재량으로 용역비용 내에서 세부 항목을 집행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허술한 외형 아닌 근로관계 실질 따져야”

관리소장의 사업자등록은 고용노동청에서부터 걸림돌이 됐다. 홍씨는 소송을 제기하기 전 입주자대표회의를 상대로 관할 노동청에 진정을 냈는데 관리소장의 사업자등록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리소장도 노동청에 임금 진정을 제기했으나 사업자라는 이유로 법 적용 제외 결정을 받았다.

이 변호사는 “관리소장은 건물을 관리하는 회사대표도 아니고 자본도 없는 노인일 뿐”이라며 “사업자등록이란 허술한 외형이 아니라 근로관계의 실질을 판단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관리소장이 지병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입주자대표회의는 홍씨를 해고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퇴사 3일 전에야 용역업체를 통해 홍씨에게 근로계약서를 체결하게 했다.

홍씨측은 실질적으로 지휘·감독을 한 입주자대표회의를 상대로 최저임금 위반 등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이번 소송에 나섰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감시·단속적 노동자 사용에 대한 고용노동부 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근로기준법을 기준으로 휴게·휴일 등을 산정해 미지급 임금과 퇴직금 2천1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취지다.

하지만 판결문은 단 한 줄로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원고와 피고 사이에 고용계약이 체결됐음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3천만원 이하 소액사건 판결서에는 소액사건심판법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변호사는 “아무리 소액사건이지만 당사자들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라며 “1년 넘게 진행한 사건을 양측 주장에 대한 판단도 없이 한 줄로 끝내면 법원 역할을 방기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강석영 기자